[펌] 쇼팽 - 낭만주의를 혐오한 낭만주의자

Et cetera 2010. 8. 12. 22:31
연습 중에 루바토(rubato)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찾은 글.

왼손은 제 박자로, 오른손은 루바토로.
어렵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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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pin
- 낭만주의를 혐오한 낭만주의자

"많은 사람들에게 쇼팽의 음악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색적인 미친 음악처럼 들렸을 것이다. 독일의 렐스탑(Rellstab), 영국의 출리(Chorley)나 데이비슨(Davison) 같은 평론가들은 쇼팽 음악을 ‘귀청이 떨어질 듯한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괴상한 음악’이라고 취급했다."

글·헤럴드 숀버그


쇼팽이 파리에 도착한 당시에는 유럽의 어느 누구도 그를 가르칠 수 없었으며, 잘못해서 쇼팽의 천부적 재능을 파괴하는 것 외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왔을 때부터 벌써 어느 면으로 보나 완전히 성숙한 음악가였다. 당시에 벌써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과 대다수의 연습곡이 작곡된 상태였고, 피아니스트로서나 작곡가로서 그의 기법에 본질적으로 더 이상 첨가할 것이 없는 상태였다(물론 쇼팽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정적으로 심오해지고 넓어지는 경향은 있었다).

어렸을 때는 음악을 들으면 울곤 하던 쇼팽이 5세 때에는 그의 맏누이가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배웠고, 16세 때에는 바르샤바 음악원(Warsaw Conservatory)의 자랑거리였다. 이 젊은 천재는 많은 귀족들의 집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쇼팽은 폴란드 귀족들의 집안과 가까이 지내면서 빈틈없는 예의범절과 상류사회의 기호를 배울 수 있었다. 18세 때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을 정복했고, 20세 되던 해에 폴란드를 떠나 빈과 슈투트가르트를 거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는 항상 그의 목표였다. “언제나 내가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몇 년이나 걸려서, 오십 년?”이라고 그는 일기에 적고 있다.

문제는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유럽을 휩쓸던 새로운 개념들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필드와 훔멜에게서 몇 가지는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쇼팽 특유의 스타일과 화성구조, 악기를 다루는 법, 장식음을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법(리스트나 다른 대가들의 음악과는 다르게 쇼팽의 대부분의 기교적 악절들은, 성숙기에 쓰인 모든 작품들도 마찬 가지로, 단지 기교적 목적에서만이 아닌 선율적 면에서 사용했다), 놀라운 화음과 전조, 쇼팽 특유의 루바토,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에 민속적 요소를 사용한 것 등 모든 것이 그가 21세 이전에 혼자서 성취한 업적들이다. 쇼팽이야말로 역사에 뚜렷이 기록될 경이적인 천재 중의 한 사람이다.


쇼팽의 루바토

쇼팽은 루바토(rubato)와 더불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폴란드의 특성으로, 쇼팽은 이 특성을 그가 연주하는 모든 것에 적용했다. 그러면 미묘한 리듬의 어긋남에 익숙지 않은 귀에는 박자가 뒤틀려진 것처럼 들렸다.

1842년, 쇼팽이 폰 렌츠(Wilhelm von Lenz)에게 레슨을 하고 있을 때, 마이어베어(Meyerbeer)가 들어왔다. 간단한 마주르카(mazurka C장조 Op.33-3)를 연주중이었는데, 렌츠는 그날 일어난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마이어베어가 자리에 앉자, 쇼팽은 나에게 연주를 계속하라고 했다.
“그 곡은 2/4 박자로군요.”
마이어베어가 말했다.
대답 대신 쇼팽은 나에게 다시 한번 치라고 하고는, 이번에는 연필로 피아노 위를 세게 두들기며 박자를 세었다. 그의 눈은 반짝였다.
‘2/4 박자’라고 마이어베어는 조용히,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나는 쇼팽이 화내는 것을 딱 한번 보았는데, 그때가 바로 그 경우였다. 그의 창백한 뺨은 미묘한 흥분으로 홍조를 띠었으며, 그를 굉장한 미남으로 보이게 했다.
“3/4 박자입니다.”
항상 적게만 얘기하던 마이어베어가 크게 말했다.
“그 곡을 나에게 주시오. 나의 오페라(당시에는 비밀로 하고 있었음) ‘l’Africaine’의 발레곡으로 사용해서 보여주겠소.”
쇼팽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자신이 그 곡을 직접 연주했다. 그는 몇 번이고 발로 박자를 세어가며 연주했는데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마이어베어는 2/4 박자라고 고집했고, 결국은 기분이 언짢아 둘은 헤어졌다.

어쨌든, 렌츠가 묘사한 이 하찮은 광경은 사실처럼 들린다. 쇼팽과 13년간이나 가깝게 지내던 할레 (Halle)의 이야기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쇼팽 연주의 특색은 그가 리듬을 아주 자연스럽게 다루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수년간 한번도 나의 귀를 거슬린 적이 없다.

1845년이나 1846년이었던 것 같다. 한번은 내가 쇼팽이 연주하는 대부분의 마주르카(보석과 같이 미려한 곡)들이 악보에 쓰인 3/4 박자가 아닌 4/4로 들리는 이유를 분석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분석 결과 나는 그가 소절의 첫 음마다 음가를 훨씬 더 길게 잡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완강히 부정했지만 내가 그에게 직접 마주르카 중의 하나를 한 소절에 네 박자씩 큰소리로 세면서 치게 하자, 그것은 완벽한 4/4 박자곡이 되었다. 그러자 쇼팽은 웃으며 설명하기를 “마주르카는 민속적인 춤으로 그런 기이한 특성이 생길 수 있다”고 했다. 더욱 기이한 현상은 4/4 박자로 들라면서도 3/4 박자의 느낌이 온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마주르카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많은 마주르카가 그렇게 쓰였다.

후에 나는 얼마나 내가 잘못 이해한 채 그에게 나의 소견을 피력하였는지, 그라고 그가 유머로서 나의 소견을 얼마나 잘 받아주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경우지만 마이어베어가 똑같은 소견을 제시했다가-아마 좀 거만한 태도로 말했겠지만 심한 말다툼을 하게 되었고,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쇼팽이 마이어베어를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았기 때문 이다.


쇼팽이 연주하는 박자의 정확성

이 모든 이야기는, 적어도 마주르카에 쓰인 쇼팽의 루바토가 다른 루바토와 비교할 때 그 심한 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으로써 그것은 그가 폴란드 혈통인 것에 기인한다. 따라서 그 루바토는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수수께끼같이 어리둥절한 것이었을 것이다. 쇼팽은 자신의 음악이라도 국민적 요소가 없는 음악을 연주할 때는 루바토를 훨씬 더 적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루바토는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연주되었지 절대로 변덕스럽게 제멋대로 연주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신한다. 1848년 살라만(Salaman)이 “쇼팽이 루바토로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그가 가장 정열적이고 환상적으로, 그리고 서사시같이 연주할 때도 얼마나 정확하게 박자·악센트·리듬을 지키고 있었는가를 예의 주시할 수 있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고 쇼팽 연주의 청취소감을 특별히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리스트와 렌츠도 둘 다 쇼팽이 루바토를 잘 다룬 것에 대해 증명하고 있다. 할레도 마찬가지이다.

리스트는 이 루바토를 묘사하기를 “루바토는 속도가 빨라지는 듯, 멈추는 듯, 방해받는 듯 흐름에 유연성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갑작스럽기도 하고 꾸물거리는 듯하기도 한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이러한 강점과 자로 잰 듯이 일정한 흔들림과 균형을 갖추고 연주하여야만 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자로 잰’(measured)이다. 정확하게 박자를 지키는 것에 관한 한 쇼팽은 제자 미쿨리(Mikuli)와 마찬가지로 용서 없을 정도로 엄격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피아노 위에서 항상 메트로놈이 있었다고 한다.

루바토는 절대로 마음대로 박자를 다루어도 된다는 허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쇼팽이 연주하는 루바토의 비결은 순간적 리듬의 변화에도 각 음의 음가를 지키는 데 있다. 이 리듬은 변동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절대로 음악의 박(拍)의 기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4분 음표는 4분 음표로, 점 8분 음표는 점 8분 음표로 연주되어야 한다.

할레와 마이어베어가 박자를 세는데 곤란을 느꼈던 것은, 쇼팽이 박자를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색다르고 자유롭게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의 방식은 구식악파에서 훈련받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우아한 것이었다. 쇼팽의 루바토는 심한 정도의 차이점을 제외하고는 모차르트의 루바토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느린 아다지오 악장에 루바토를 썼는데, 왼손은 박자를 지키며 치도록 명시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편지내용을 알 리 없는 렌츠는, 쇼팽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왼손은 지휘자와 같은 것으로, 마음대로 동요되거나 기본 박자를 잃어서는 안되지만 오른손은 네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연주하라. 가령 어떤 곡을 연주하는 데 수 분의 시간이 걸린다면, 그 곡 전체를 그 시간만큼 연주하되 세부적으로는 변화 있게 박자가 움직이는 것이다.” 리스트의 유명한 정의는 똑같은 내용이지만 표현은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저 나무들이 보입니까? 바람은 잎을 스치며 지나가고 인생은 그 밑에서 펼쳐지고 전개됩니다. 그렇지만 나무는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죠. 바로 이런 것이 쇼팽의 루바토입니다!”

요약하면 루바토는 박자를 필요한 만큼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기본적인 박자가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위의 이야기들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쇼팽 자신은 고전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해서 결코 할 수 없었던 것을 19세기의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루바토라는 명목 하에 이를 분별없이 과장되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쇼팽과 고전주의는 서로(어울리지 않게)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모든 낭만주의자들 중에서 쇼팽은 단연코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고전주의적 사람이었다.

대부분 그의 작품은(그의 2개의 소나타와 2개의 콘체르토를 제외한) 음악형식이 내용에 완벽하게 맞게 쓰인 것이라든지 신중하고 정확하게 쓰인 그의 기법 등으로 미루어 고전주의적이라 하겠다. 쓸데없이 곡을 늘리기 위한, 혹은 내용 없이 화려하기만 한 악절도 거의 없다. 바흐 음악은 항상 쇼팽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음악 회전에는 문을 잠그고 조용히 바흐의 평균율 중에서 하나를 치곤했다. 쇼팽이 사망하던 마지막 해에 그는 친구인 들라크루아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 이 위대한 화가는 쇼팽과 지낸 어느 오후의 일을 잡지에 자세히 기재하고 있다.

“낮동안 나와 더불어 음악에 대해서 토론한 것이 그에게 활기를 주었다. 나는 그에게 음악에서 어떤 점들이 음악을 논리적으로 성립시키는가를 물었다. 그는 내가 대위(counterpoint)와 화성(harmbny)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설명하고 나서 음악에서 논리는 푸가인데 이 푸가를 잘 이해하게 되면 바로 음악의 요소인 논리·조화·일관성과 접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작은 낭만주의자 쇼팽이 마치 교회의 악장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렇지만 고전주의적 요소는 항상 지니고 있었다. 쇼팽의 모든 장·단조로 쓰인 프렐류드는 적어도 조성의 개념에서는 바흐의 평균율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쇼팽의 첫번째 C장조 프렐류드는 바흐의 첫번째, 역시 C장조인 프렐류드에 경의를 표한 것이 아닐까? 두 개의 프렐류드를 천천히 쳐보면 둘은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 비슷하다). 에튀드 역시 장·단조 관계로 시작하지만, 그 관계는 갈수록 희미해진다. 바흐 음악 이외에 쇼팽이 사랑한 것은 모차르트 음악이었는데, 모차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E장조(K.542)는 쇼팽이 연주하는 프로그램에 계속 나타났다.

쇼팽은 베토벤의 음악은 별로 연주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베토벤의 A플랫 소나타(Op.26)를 연주하곤 했다. 그는 할레에게 E플랫 장조 소나타(Op.31-3)는 ‘매우 수준 이하’라고 말했고, 멘델스존의 ‘무언가’(Songs Without Words)는 평범하지 않지만 그것도 싫다고 했다. 쇼팽은 누구의 음악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며, 오직 바흐와 모차르트에게만 강력하게 끌렸다. 그는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충실하게 공부했으며, 그들 의 이상적 작곡기법을 자신의 음악과 피아노 연주에 활용했다.

그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조그마한 방에서 들으면 불길과 같은 정열적인 면도 있었다. 모셸레스가 말했듯이 쇼팽의 피아니시모는 오직 숨소리만 들릴 정도였으며 소리를 대조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연주 결과는 독일악파가 피아니스트들에게 요구하는 관현악 소리와 같은 음향효과를 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물론 쇼팽의 완벽한 테크닉은 절대적으로 깨끗하며 흐르는 듯한 소리를 내지만, 그것이 당시의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을 감동하게 한 것은 바로 그의 자유로우면서도 시적이고 뉘앙스를 풍기는 연주였다. 그는 자신의 ‘뱃노래’(Barcarolle)를 연주할 때 클라이맥스에서 악보에 쓰인 대로 포르티시모(Fortissimo)가 아닌 피아니시모(Pianissimo)로 연주했다.

“하지만 저렇게 훌륭한 뉘앙스를 곁들일 수 있다니…”라고 할레는 외쳤다. “이 새로운 방법이 재래의 방법보다 낫지 않다고 말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런 종류의 뉘앙스와 음색은 레가토가 훌륭할 때 가능한 것이다.

쇼팽의 말년을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브로드우드(Broadwood) 피아노 회사의 히프킨스(Alfred Hipkins) 이다. 그는 1848년, 쇼팽이 런던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기도 했지만 쇼팽의 피아노 조율사로서 가깝게 지냈다(그 자신이 훌륭한 피아니스트였고, 역사가이자 하프시코드 연구의 선구자이다). 쇼팽은 이튼 가(Eaton Place) 99번지 사토리스 부인(Adelaide Satoris)의 집처럼 병약한 피아니스트에게 적합한 약 150석 정도를 갖춘 장소에서만 연주했다. 거의 임종에 가까운 1848년의 모습은 너무 쇠약해서 “그가 마치 투명하게 보였다”고 목격자는 말한다.

히프킨스는 또 쇼팽의 뛰어난 피아니시모와 노래하는 듯한 레가토 터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쇼팽이 페달을 충분히 사용했고, 특히 왼손이 아르페지오 악절을 연주할 때는 “마치 음향이 대양의 파도소리처럼 커졌다 작아졌다 하게 했으며, 팔꿈치는 되도록 폼 쪽에 가까이 오게 하고 팔무게가 아닌 오직 손가락만으로 연주했다”고 말한다.

“쇼팽은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손 모양을 만들었으며, 가장 쉬운 운지법을 활용하여 비록 그 방법이 규칙에 위반된다 해도 그에게 적합하면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쇼팽은 마치 오르가니스트가 자주 그러하듯이 한 건반에서 다른 손가락으로 바꾸곤 했다.”

쇼팽은 체르니·훔멜 악파의 고전주의자들이 찬성하지 않는 흑건(黑律)을 엄지로 치거나 또는 엄지손가락을 새끼손가락 아래로 보낸다든지, 같은 손가락으로 흑건에서 백건(白律)으로 미끄러지듯 연주한다든지, 혹은 백건에서 흑건으로까지도 서슴지 않고 실행했다.

그러나 힙킨스가 “쇼팽이 오직 손가락만으로 친다”고 한 설명을 쇼팽이 항상 그렇게 연주했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는 마지막 병상 생활을 통해 폼의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쇠약한 체질은 무거운 어깨라든지 팔의 움직임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쇼팽 자신이 팔의 윗부분(팔꿈치부터 어깨까지)을 사용해서 쳐야만 한다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쇼팽이 모든 위대한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가장 육체적으로 현란하지 않게 연주했다고 말하는 것이 공평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프랑스 교육자 마몽텔(Marmontel)은 “쇼팽이 손가락의 균일성과 손의 완전한 자유스러움을 주장한 것으로 미루어, 클레멘티 악파로 그 근원을 유추할 수 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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